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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3,600억 유로에 몰린 EU, 관세 대신 '조건'을 내민다

류근웅류근웅 기자· 2026/9/10 15:05:06· Updated 2026/9/10 15:05:16

유럽연합은 지금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협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문지기다. 지난 6월 EU는 중국과 7년 만의 공동 무역협상에 들어갔고, 통상담당 집행위원인 마로시 셰프초비치는 9월 2일 "10월까지 구체적 성과가 없으면 더 가혹한 조치에 직면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사흘 뒤인 9월 8일 로이터는 그가 중국 측에 ▲대EU 수출 대규모 확대 ▲유럽 기업의 대중 수출 제한 ▲희토류 등 전략물자 수출 통제를 협상 의제로 삼았다고 전했다. 관세로 하나씩 막던 시대에서, 시장 접근 자체를 걸고 거래하는 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적자는 10년 만에 두 배가 됐다

유로스타트 통계로 잰 2025년 EU의 대중 상품무역는 수출 약 1,996억 유로, 수입 약 5,594억 유로다. 적자는 약 3,600억 유로로 전년보다 15% 불어난 역대 최대다. 2015년 1,800억 유로에서 10년 만에 정확히 두 배다. 연합뉴스와 가디언은 이를 "하루 10억 유로씩 새는 적자"로 표현했다. 분기 추이는 더 직설적이다.

시점EU 대중 상품무역 적자
2024년 1분기약 660억 유로
2026년 2분기약 1,030억 유로

2년 만에 적자가 56% 커졌다. 미국의 관세 장벽에 밀려난 중국산 물량이 유럽으로 돌아섰다는 분석이 로이터 등에서 반복해서 나온다. South China Morning Post가 집계한 7월 통계에서 중국의 무역흑자는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24개국에서 더 커졌다.

관세 버리고 '최소가격'으로 간 유럽의 계산

EU의 도구가 바뀌고 있다. 2024년 중국 전기차에 부과한 반보조금 관세는 즉각적인 중국의 보복관세를 불렀다. 그래서 EU가 꺼내든 카드가 '가격 인수(price undertaking)'다. 2026년 1월 EU 집행위는 중국 전기차 업체가 관세 대신 최소판매가격을 약속하는 방안의 가이드라인을 내놨고, 베이징은 이를 "WTO 체제 내 분쟁 해결의 긍정적 사례"로 받아들였다. 7월 1일부로는 150유로 미만 소액 소포에도 관세를 물리기 시작했다. 각개 관세가 아니라, 시장에 들어오는 조건 전체를 재설계하는 방식이다. 셰프초비치는 9월 중순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화상회담을 앞두고 있고 10월엔 직접 베이징을 찾은 뒤 브뤼셀 정상회의에 결과를 보고한다.

관리무역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EU 내부에서도 우려는 크다. 가격을 통째로 관리하는 방식은 보호무역이라는 원래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관세든 최소가격이든 결국 그 비용은 유럽 소비자와 유럽 내 조립·유통 업계로 전가되고, 중국이 희토류로 맞대응하는 지금 보복의 악순환만 커진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중국은 사이버보안법·산업가속화법을 규제 카드로 유지하고 있다. 다자 무역질서를 지키겠다던 EU가 양자 거래로 내려앉으면서 위신 문제도 생긴다. 유럽이 이 길을 고수하는 이유는 하나다. 기존 도구로는 10년 동안 적자 곡선을 한 번도 꺾지 못했다는 실패의 기록이다.

한국은 이 판을 먼저 지나쳤다

한국 독자에게 이 그림은 낯설지 않다. 한국무역협회 집계로 한국의 대중 수출 비중은 2020년 25.9%에서 2026년 1분기 19.5%로 내려왔다. 국가지표체계 기준 2025년 대중 수출 비중은 18.4%로 여전히 최대 시장이지만, 철강·석화·이차전지에서 중국의 수입 대체가 진행된 결과다. 중국의 자체 공급망 내재화를 먼저 맞은 나라가 한국이다. EU가 지금 시작하는 관리무역은 한국에 두 가지로 돌아온다. 최소가격·조건부 시장접근 같은 규칙은 중국 기업에만 적용되지 않고 유럽 시장에 진출하는 한국 배터리·완성차 기업에도 똑같이 요구된다. 반면 유럽이 중국 물량을 문턱에서 막으면 반도체 호조로 반등 중인 대중 수출의 하방 압력은 그만큼 커진다. 남의 일정이 아니라 규칙이 바뀌는 일정이다.

적자 3,600억 유로는 통계가 아니라 유럽이 규칙을 다시 쓰기로 결정했다는 신호다. 10월 베이징에서 나올 합의의 문구 자체보다, '시장 접근에 조건을 건다'는 방식이 이후 유럽 통상정책의 표준이 되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그 규칙 안에서 한국 기업이 살아남을 카드는 가격이 아니라 기술과 보조금 투명성이다.


분석 근거: Eurostat EU-China 무역통계, Reuters, The Guardian, Euronews, 연합뉴스, South China Morning Post, 한국무역협회 보고서. 공개 데이터·보도에 근거한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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