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초과세수, '국부의 저주' 우려
지난해 반도체 산업의 호황으로 15조 원이 넘는 세금이 예상보다 많이 걷혔다. 이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국민에게 나눠주자', '나라 곳간에 넣어두자'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으며, 섣부른 결정은 미래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경제는 AI 혁명과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영향으로 기업 이익과 세수가 구조적으로 폭증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이는 2023년 역대 최대 세수 결손 56조 원, 2024년 31조 원 부족과는 상반된 상황이며, 향후 3년간 100조 원에 달하는 초과 세수 발생 전망이 나온다. AI 시대의 '디지털 광산' 역할을 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막대한 이익은 장비, 소재, 전력, 건설, 물류 등 후방 산업의 부를 팽창시키며 국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이익 공유 방안을 두고 노동계,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간 주도권 경쟁과 함께 '국민 배당금' 등 다양한 활용 아이디어가 거론된다.
과거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자원이 풍부했으나 포용적 제도가 부재했던 국가들은 넘쳐나는 부를 사치, 소비, 인플레이션, 제조업 붕괴 등으로 낭비하며 '국부의 저주'에 빠졌던 역사적 사례가 대한민국에 대한 경고로 제시된다. 국가에 막대한 부가 쏟아져 들어올 때 초기 풍경은 유사하다. 하지만 그 부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국가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대륙에서 쏟아진 금은으로 막대한 부를 누렸으나, 포용적 제도가 없어 약탈적 부를 미래 자산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넘쳐나는 유동성은 왕실의 사치와 맹목적인 소비, 전쟁으로 흩어졌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내수 제조업과 농업을 붕괴시켰다. 쉽게 들어온 돈은 혁신의 동기를 사라지게 했다.
1959년 대규모 천연가스전을 발견한 네덜란드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국부 유입으로 자국 통화 가치가 폭등하면서 기존 수출 효자 종목이었던 제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잃고 몰락했다. 이는 '네덜란드 병'이라 불리며, 자원의 저주가 경제에 치명타를 입히는 사례다. 반면, 같은 기회 속에서도 다른 결말을 쓴 국가들이 존재한다. 18세기 영국은 대규모 상업적 부가 유입될 때 '특허법'과 사유재산 보호라는 포용적 제도를 확립했다. 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법적 안전망을 제공했고, 유입된 자본은 산업혁명의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노르웨이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1969년 북해 유전 발견 당시, 노르웨이는 네덜란드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았다. 막대한 현금 앞에 인간 본성이 방만해지기 쉬움을 인정하고, 오일머니를 국내에 풀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대신 국부펀드를 조성해 해외 자산에 투자했다. 철저한 재정 준칙 아래 원금을 보호하며, 석유로 번 돈을 당대가 아닌 미래에 투자하는 전략을 택했다. AI 시대 초과 국부를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역사적 교훈과 글로벌 선도국들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국민에게 단순 현금 지급 대신 'AI 무기'를 쥐여줘야 한다. 몰타의 AI 서비스 무상 지원이나 싱가포르의 '스킬스퓨처'처럼, 국민의 평생학습 계좌에 자금을 지원하여 AI·데이터 분석·코딩 등 미래 역량 강화에 투자해야 한다. 현금은 일회성 소비로 끝나지만, 국민의 뇌에 투자된 역량은 세대의 경쟁력이 된다.
AI는 전통적 일자리를 소멸시키고 산업 구조를 재편하므로, 청년들이 안정된 직장을 기다리기보다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사회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프랑스의 '스테이션 F'처럼 창업자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실패를 포용하는 실업 급여 지급 등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제2, 제3의 삼성전자를 탄생시킬 혁신의 엔진이 된다. AI 혁명은 소프트웨어 산업인 동시에 막대한 자원을 집어삼키는 '중후장대' 산업이다. 초과 국부의 종착지는 국가의 물리적 뼈대를 다시 세우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데이터센터를 감당할 송배전망 전면 교체, SMR 등 무탄소 전력 인프라 확충은 다른 국가가 넘볼 수 없는 진입 장벽을 형성한다.
국부펀드라는 그릇보다 제도의 뼈대를 먼저 세워야 한다. 정부는 반도체 초과세수를 재원으로 30조 원 규모의 한국형 국부펀드 조성을 논의 중이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30년간 약 3,250조 원 규모로 성장했으나, 그 비결은 엄격한 세 가지 철칙에 있었다. 펀드 기대수익률 안팎으로만 인출 가능, 인출 시 의회 승인 필수, 중앙은행 위탁을 통한 정치로부터의 독립이다. 원금 보호, 재정 준칙, 정치적 독립이라는 자물쇠가 30년을 지속시켰다.
대한민국은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인 반도체, 전력망, 데이터센터 관련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맹렬한 추격을 뿌리치고 국내 초격차 산업을 지키고 키우기 위한 국부펀드의 전략적 투자는 필요하다. 그러나 펀드 조성에 앞서, 노르웨이와 같이 철저한 재정 준칙과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때, 초과 국부는 '국부의 저주'가 아닌 미래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한 튼튼한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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