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약속하고 12.8% 늘린 예산안, 162조 기금에 숨은 산수
이재명 정부의 첫 본예산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3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의무지출 감축 목표를 예산 편성지침에 담았고, 6개월 뒤 국회에 넘긴 예산안은 역대 최대 폭으로 불어났다. 재정지표는 오히려 좋아졌는데, 그 숫자 뒤에 어떤 구조가 숨었는지 따져볼 차례다.
5.5%를 약속하고 12.8%를 담았다
기획예산처는 3월 30일 2027년 예산안 편성지침에서 재량지출 15%, 의무지출 10% 감축과 재정사업 10% 폐지를 요구했다. 의무지출에 절감 목표를 단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지출 증가율도 5.5%로 못 박았다. 그런데 9월 3일 국회에 제출된 정부안의 총지출은 820조 9000억 원이다. 올해 본예산 727조 9000억 원보다 93조 원, 증가율로 12.8%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반년 만에 약속과 결과의 차이가 두 배 이상 벌어졌다.
| 항목 | 편성지침(3월) | 정부안(9월) |
|---|---|---|
| 지출 증가율 | 5.5% | 12.8% |
| 재량지출 | 15% 감축 | — |
| 의무지출 | 10% 감축(사상 첫 목표) | — |
| 총지출 | — | 820조 9000억 원 |
162조 기금의 배분표
늘어난 지출의 상당분은 '미래대응기금'이라는 새 그릇에 담겼다. 반도체 호황으로 거둔 추가세수 162조 3000억 원을 통째로 기금화한 것이다. 문제는 배분이다. 미래 투자로 실제 집행되는 사업지출은 45조 4000억 원뿐이고, 104조 4000억 원은 '여유자금'으로 통장에 쌓인다. 기금 10원 중 6원가량이 일하지 않는 돈이다.
| 미래대응기금 162조 3000억 원 | 구분 |
|---|---|
| 45조 4000억 원 | 사업지출(투자) |
| 7조 5000억 원 | 사업계정 여유자금 |
| 104조 4000억 원 | 여유자금 예치 |
빚을 내면서 예금을 쌓는 구조
한국경제는 9월 9일 여유자금 104조 4000억 원이 내년 국가채무 증가분(약 106조 원)과 맞먹는다고 짚었다. 국채를 발행해 이자를 물면서 같은 액수의 현금을 금고에 쌓는 셈이다. 정부는 민간 자산운용사에 맡겨 국고채 금리를 웃도는 연 4% 수준의 수익률을 내겠다고 하지만, 시장 금리와 역전되면 그 차액만큼 혈세가 깎인다. 서울경제가 확인한 기금 내 140개 사업의 성과관리 실적은 0건이었다.
자물쇠 없는 162조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규칙이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결산 세계잉여금에 채무 상환 의무 비율을 두는데, 미래대응기금법에는 같은 장치가 없다. 뉴스핌 데스크칼럼이 '자물쇠가 없다'고 지적한 지점이다. 초과세수가 들어오면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게 국민의힘 김상훈 의원의 주장이고, 같은 당 임이자 의원은 '미래소멸기금'이라 불렀다. 국감에서 '쌈짓돈' 공방이 벌어진 이유다.
정부·여당의 반박에도 숫자는 있다
기획예산처 박홍근 장관은 쌈짓돈 주장을 "전혀 근거 없는 정치 공세"로 일축했다. 정부 데이터에도 근거는 있다.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3.8%p 줄어 -0.1%로 20년 만에 가까운 균형에 닿고, 국가채무 비율도 51.6%에서 48.3%로 떨어진다. 민주당 문진석 의원은 기금을 미래 성장동력 확보 정책이라고 설명한다. 반도체 특수로 거둔 돈을 흑자 예산으로 전환했다는 논리다.
다만 이 지표는 세수 호황이 가져온 일시적 개선이다. 정부 스스로 2028년부터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다시 128조 9000억 원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반도체 사이클이 꺾이는 날 자물쇠 없는 기금과 역마진 구조가 그대로 남는다면, 이번 예산은 호황을 흘려보낸 회계로 기록된다. 12월 본회의 전 국회가 사업별 심사에서 달아낼 자물쇠는 세계잉여금과 같은 상환 준칙의 법제화다.
분석 근거: 정책브리핑(korea.kr), 세정신문, 한국경제, 서울경제, 뉴스핌, 뉴스1·대전일보 국감 보도. 공개 데이터·보도에 근거한 분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