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도 못 푼 북한 여행금지 미 하원이 건드렸다
미국 의회에서 9년 묵은 대북 여행금지 해제 주문이 나왔다.
미국 하원의원들은 성명을 내고 트럼프 행정부에 북한 여행금지 조치를 거둬달라고 정식 요구했다. 여행금지는 2017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북한 수감 끝에 의식불명 상태로 송환된 뒤 숨지자 국무부가 시행한 조치다. 이후 국무부는 조치를 매년 갱신해 왔고, 미국인의 북한 방문은 사실상 전면 차단된 상태다. 의회가 공개 성명으로 해제를 요구한 것은 행정부의 대북 정책 방향을 다시 세우라는 압박으로 읽힌다.
9년간 막혀 온 교류의 통로
북한 여행금지는 특정 국가를 향한 미국 여권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이례적 행정 조치다. 이를 어기면 여권 규정 위반으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언론 취재나 인도적 사유에 대한 특별 승인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조치가 길어지면서 인도적 지원 단체와 종교계의 북한 내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전문가들은 이런 교류 공백이 북미 사이의 오해를 키우는 요인이 됐다고 지적해 왔다.
숫자로 보면 조치의 무게가 더 분명해진다. 북미 정상이 직접 만난 역사적 국면에서도 이 금지는 단 한 차례도 풀리지 않았다. 관계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유지된 사실상 유일한 대북 통제 장치라는 뜻이다. 하원의원들이 성명으로 이 조치를 들어내자고 나선 것은 압박 일변도 접근의 한계를 인정한 셈이다.
정상회담으로도 못 푼 카드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시절 북미 정상 외교의 장을 열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회담에서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 최고지도자와 마주 앉았고, 이듬해 하노이 회담과 판문점 회동까지 세 차례 만났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비핵화 협상이 결렬되며 접근의 실험은 중단됐고, 여행금지는 그 어느 때에도 해제되지 않았다.
의회의 요구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상 간 담판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 교류와 인도적 접촉으로 관계의 지반을 먼저 다지자는 구상이다. 여행금지 해제는 비핵화 협상과 별개로 추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정부가 곧바로 꺼낼 수 있는 저비용 신뢰 구축 수단이기도 하다.
이재명 정부의 이중 트랙과 맞닿는다
한국 정부의 대북 기조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국방부는 연말쯤 이재명 정부 첫 국방백서를 발간하며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반면 통일부 장관은 '핵 없는 한반도'를 목표로 북핵 문제 진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한국전쟁 유해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 추진을 언급하며 인도적 협력의 물꼬를 텄다.
적 규정은 유지하되 대화와 인도 협력의 문은 여는 이중 트랙이다. 미국이 여행금지를 풀면 이 트랙의 활동 폭이 그만큼 넓어진다. 인적 교류가 남북은 물론 북미 관계의 온도를 높이는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거꾸로 여행금지가 이어지면 한국의 대북 접근 공간도 함께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해제까지 남은 관문
전쟁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평화는 혼자 세울 수 없다. —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결정 열쇠는 국무부가 쥐고 있다. 여행금지는 의회 입법이 아닌 행정 조치여서 갱신을 중단하면 효력이 끝난다. 그만큼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만으로도 해제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웜비어 사건의 상흔이 커서 부담 없는 결정은 아니며, 북한의 추가 도발이 돌아오면 논의는 즉시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의회에서 해제 목소리가 나왔다는 점은 대북 정책의 지형이 압박에서 교류 병행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행금지 해제는 평화를 혼자 세우지 않겠다는 첫 시험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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