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수출 호황, 전력망이 발목 잡는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엔비디아향 HBM4 공급으로 사상 최대 실적 기대를 받고 있는데, 그 반도체를 실제로 돌릴 전력은 어디서 끌어오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답이 궁색해진다. 칩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그 칩을 담는 그릇인 전력망은 9년 전 설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HBM4, 한국이 쥔 카드
SK하이닉스는 올해 2분기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4의 첫 출하를 시작했고, 엔비디아와 대규모 장기 공급 계약을 맺어 가격 결정권까지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5년 HBM 시장 점유율은 매출 기준 61%로 SK하이닉스가 1위를 지켰고, 2026년에도 50% 안팎의 점유율로 선두를 유지할 전망이다. 삼성전자 역시 저전력 모듈 SOCAMM2와 HBM4를 묶은 원스톱 솔루션으로 반격에 나섰다. 두 회사 모두 엔비디아 GTC 2026에서 HBM4 주도권을 놓고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런데 전기는 어디서 오나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 집계로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2020년 398메가와트(㎿)에서 2025년 1000㎿를 넘어섰고, 2029년에는 1569㎿(1.5GW)까지 늘어난다. 9년 만에 4배 증가하는 셈이다. 수도권 민간 데이터센터 비중은 73.4%, 상업용 데이터센터 평균 가동률은 92.43%로 이미 포화 상태다. HBM을 만드는 팹도, 그 칩을 쓰는 데이터센터도 결국 같은 전력망에 목을 매고 있다.
한전 적자가 산업 리스크로 번지는 구조
문제는 그 전력망을 쥔 한국전력의 재무 상태다. 연결 기준 한전 부채는 205조7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이고, 누적적자는 28조원, 연간 이자 비용만 4조3000억원(하루 약 119억원)에 달한다. 2016년 104조원이던 부채가 9년 만에 두 배로 불었다. 계통 접속 지연이 5년 이상 걸리는 사업장이 나오는 이유는 인허가 문제만이 아니라 변압기 등 전력기기 공급 병목과 투자 여력 부족이 겹친 탓이다.
| 지표 | 수치 |
|---|---|
|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수요(2025년) | 1,000㎿ 초과 |
|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수요(2029년 목표) | 1,569㎿ |
| 한전 연결 부채 | 205조 7,000억원 |
| 한전 누적적자 | 28조원 |
| 한전 연간 이자비용 | 4조 3,000억원 |
시장 신호와 정치 요금의 충돌
HBM 수출은 시장이 보낸 명확한 신호다. 세계가 한국산 메모리를 원한다. 그런데 그 신호를 받아 전력 인프라에 투자해야 할 한전은 원가 이하 요금 구조에 발목이 잡혀 있다. 2021~2023년 역마진을 감수하며 쌓인 적자 47조8000억원이 그대로 부채로 굳었다는 분석은, 전기요금을 정치적으로 눌러온 결과가 지금의 투자 지연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반론도 있다. 전기요금을 원가에 맞춰 올리면 가뜩이나 얇아진 제조업 마진과 서민 가계에 즉각 부담이 전가된다는 지적은 타당하고, 공공요금의 급격한 정상화가 물가 전반에 미칠 파급도 무시할 수 없다.
칩 다음은 그리드다
HBM4 수출 성적표는 한국이 아직 기술 경쟁에서 밀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다만 그 경쟁력이 정작 국내 팹과 데이터센터를 돌릴 전력 공급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투자는 전력망 여유가 있는 다른 나라로 옮겨갈 수 있다. 변압기 공급 병목과 계통 접속 지연은 몇 달 안에 풀릴 문제가 아니고, 한전 부채는 요금 정상화 없이는 줄어들 구조가 아니다. 반도체 훈풍이 전력망이라는 병목 앞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다.
분석 근거: 글로벌이코노믹, 그린데일리, 뉴데일리, 전자신문, 전기신문, KB금융지주 리서치. 공개 데이터·보도에 근거한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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