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 해지 버튼 앞에 유혹의 문을 몇 겹으로 두는 것은 혜택을 챙겨 주는 것이 아니라 그만두려는 사람의 시간을 걷어 가는 일이다광장
해지 절차마다 걸어 둔 유혹의 문은 혜택이 아니라 이탈에 부과하는 비용이다.
가장 자유로운 시장에서 소비자의 자유는 종료 버튼에 가로막힙니다. 월정액으로 쓰던 서비스를 그만두려 해지 화면을 누르면 할인 유예와 보너스 제시가 겹겹이 나타나고, 전화 연결을 요구하는 곳도 흔하며, 무료 체험을 끝낸 순간 묵시적으로 결제가 이어지는 구조도 확인됩니다. 가입은 클릭 한 번이지만 해지는 시간을 바치는 노동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통신·가전 기업들이 구독 사업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는 지점에서, 이 이탈 장벽의 의미는 단순한 번거로움이 아닙니다. LG전자는 2023년 대형 가전 구독에 나선 뒤 정수기·냉장고·세탁기·건조기·에어컨·TV·노트북까지 제품군을 넓혔고, 매출 2조 원을 목표로 기업 고객과 해외 시장까지 사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KT 역시 구글 AI 단독 상품과 커피·생활 혜택을 결합한 구독팩 8종을 월 7000원부터 내놓았습니다. 기업이 구독 생태계를 키우는 속도만 빠릅니다. 소비자가 그 생태계를 걸어 나오는 길은 그만큼 좁혀지고 있습니다. 매출 2조 원짜리 잔치가 출구에 인내의 문을 세워둔 채 열리는 셈입니다.
KT는 지난해 8월 무단 소액결제 해킹 사건 이후 해지 가입자에게 월 100GB 무료 데이터를 제공하며 보상에 나섰습니다. 그 보상은 지난달 종료됐습니다. 참으로 기업적입니다. 신뢰를 깬 뒤 보상을 내걸었고, 그 보상마저 기한을 정해 거두어들였으니,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탈을 지연시키는 데 보상을 쓴 꼴입니다. 소비자가 머무는 이유가 혜택이 아니라 해지가 번거로워서라면, 그 잔존은 충성이 아니라 이탈 비용에 갇힌 상태입니다.
무료 체험을 앞세운 구독 상품들이 카드 정보를 먼저 받고 체험 종료 시 묵시적으로 자동 결제로 넘어가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습니다. 체험은 곧 결제의 전단지입니다. 시작할 때 명시적이었던 동의가 끝맺을 때는 묵시적으로 둔갑하는 구조입니다. 가입할 때는 클릭 한 번으로 수락하면서, 해지할 때는 여러 화면을 거치고 유예를 넘기고 대기 시간을 치러야 한다면, 양쪽 문턱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동의의 대칭성이 무너집니다. 계약은 시작과 끝이 같은 무게를 가져야 성립합니다. 끝을 무겁게 만드는 구조는 가입 시의 동의를 사실상 강제와 다름없게 만듭니다.
해지 과정에서 혜택 상실을 알리는 창이 반복해 제시되고, 전화 상담만으로 해지를 받는 곳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소비자를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에 비용을 붙이는 장치입니다. 유혹 문구는 한 번이면 충분하고, 해지는 가입과 같은 클릭 수로 가능해야 마땅합니다. 기업이 소유하지 않는 재화를 월정액으로 쓰게 하는 구독 경제에서, 소비자가 지불하는 대가는 서비스 이용일 뿐 이탈의 번거로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떠날 자유가 전제되지 않은 머무름은 동의가 아닌, 갇힌 채 납부하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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