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 버튼을 감추고 전화를 걸게 하는 것은 고객 확인이 아니라 그만두는 사람의 귀찮음에 기대는 장사다광장
가입은 손가락 한 번으로 끝나는데 해지는 전화기를 들게 하는 구조는 편의가 아니라 나가는 길에 세워 둔 영업이다.
가입할 때와 해지할 때, 회사도 서비스도 고객도 같습니다. 그런데 절차의 속도만 다릅니다. 이 어긋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OTT 구독이나 멤버십, 통신 요금제는 앱 안에서 화면 몇 번 조작으로 가입해 놓고, 해지는 전화 상담이나 대리점 방문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절차가 오래 끌수록 회사에 이득이 되고 고객에게 손해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논란이 되는 이유입니다.
회사 쪽이 드는 명분은 늘 같습니다. 고객 확인이요, 보안이죠. 그런데 그 전화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상담원이 가장 오래 시간을 쓰는 부분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왜 그만두려는지, 어떤 할인이면 마음이 바뀌는지 캐묻는 일이라는 것을요. 신원 확인이라면 문자 인증 한 번으로 충분한 시대에 굳이 사람을 대기열에 세우는 이유는 보안이 아니라 이탈을 막는 데 있는 셈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관행은 개별 상담원의 성실함이 아니라 조직의 설계라는 점입니다. 이탈 방지 상담은 성과로 측정됩니다. 붙잡은 구독 건수가 늘면 평가가 좋아지고, 그 지표가 절차를 그대로 두는 이유가 됩니다. 해지하려는 사람이 견뎌야 하는 대기와 설득은 부작용이 아니라 제품입니다. 회사 입장에서 귀찮음은 비용이 아니라 수익의 원천입니다.
계약은 시작과 끝이 대칭이어야 합니다. 시작할 때 의사 한 번이면 됐던 일을 끝낼 때는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계약의 자유가 아니라 계약 종료에 붙은 벌금입니다. 장애나 사고가 터지면 보상 혜택을 내걸어 해지 흐름을 막는 관행이 통신업계에서 반복되어 온 것도 같은 구조의 다른 표정입니다. 붙잡는 방식이 혜택이든 귀찮음이든, 고객의 판단 대신 회사의 사정이 절차를 설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답은 단순합니다. 해지는 가입과 같은 화면, 같은 손가락 움직임으로 가능해야 합니다. 해지 사유를 묻고 유지 제안을 하고 싶다면 해지가 완료된 뒤에, 원하는 사람에게만 물어야 합니다. 관문 앞에서가 아니라 출구 뒤에서요. 절차를 간소화하겠다는 약속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해지 완료율과 유치 성과를 함께 공개하도록 해야 이 설계는 스스로를 고칠 수 있습니다.
고객을 붙잡는 방법은 서비스를 좋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해지 버튼을 숨겨서 지키고 있는 회사는 고객을 지킨 것이 아니라, 고객이 돌아올 마지막 타이밍을 스스로 지워버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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