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 예산을 빨대라고 부르는 언어 자체가 이미 처우 개선 공약의 실패다광장
순직 소방관 조문 앞에서 재조명된 '재정 빨다' 발언은 우발이 아니라 예산을 보는 잣대의 노출이다.
박세미 필자2026년 10월 18일'빨대'라는 단어는 우연히 튀어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의 자리에 이미 예산을 바라보는 행정 철학이 앉아 있었던 셈입니다.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국정감사에서 소방 예산을 '재정 빨대'라고 표현한 사실이 언론 보도로 확인되며 논란이 커졌고, 부천 공장 화재로 소방관이 순직해 빈소가 마련된 가운데 그 발언이 재조명됐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김민석이 사과 요청에 나섰고, 추 지사는 공식 사과하며 순직 소방관 빈소를 조문했습니다. 그러나 사과가 논란의 끝이 될 수 없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그 단어가 드러낸 것은 개인의 언어 감각이 아니라 예산을 대하는 잣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빨대는 액체를 빨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무언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빼내는 것, 그것이 이 단어의 본질입니다. 소방 예산에 그 말을 붙인 순간, 화재 진압과 구조에 투입되는 돈이 새어나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드러났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비용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손실로 읽힌 것입니다. 언어는 예산 편성의 우선순위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며, 그 거울에 비친 것은 소방을 투자가 아니라 비용으로 분류하는 행정 감각입니다.
구조적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소방관 예우와 처우 개선을 약속한 사실이 보도로 전해지지만, 같은 당 소속 지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빨대'였습니다. 이재명 역시 부천 화재 순직 소방관 관련 안전대책 점검과 처우 개선을 약속했고, 광주 여성 소방관 사망 사건에서는 '최악의 갑질'로 규정하며 최대 문책을 지시했습니다. 국립소방병원 개원식에 참석해 소방공무원을 위한 의료기관의 역할을 강조했고, 폭염과 가뭄에 행정력 총동원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산 편성 자리에서 동료 당원이 택한 언어는 그 모든 약속을 빈 말로 만들었습니다. 처우 개선을 공약 문서에 적어놓고, 편성 회의에서는 그 예산을 빨대로 부르는 것 — 이것이 공약과 현실 사이에 벌어진 진짜 간극입니다.
대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천하람이 이기인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부천 화재 순직 소방관 빈소를 찾아 조문한 장면이 보도로 전해집니다. 빈소 앞에서의 예우와 예산 회의실에서의 언어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입니까? 있습니다. 예산이 생명을 지키는 비용이라는 사실을 회의실에서도 기억한다면, 빈소에 갈 일 자체가 줄어들 것입니다. 빈소를 찾는 예의와 예산을 빨대로 부르는 무례함이 같은 정치 진영 안에서 공존한다는 점이, 이 논란이 단순한 말실수 문제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도치법을 한 자리에 박아두겠습니다. 공약 문서에만 남은 처우 개선, 그것이 진짜 빨대입니다. 세금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편성된 예산이 화재 현장에서 생명을 구하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이며, 투자를 비용으로 착각하는 행정이 결국 소방관을 현장에서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구조를 만듭니다.
추미애가 사과하며 폄훼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취지로 해명한 사실이 보도로 전해집니다. 의도가 아니라 결과가 문제입니다. 발화한 순간 이미 예산을 대하는 시각이 드러났고, 그 시각은 사과 한 번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예산 편성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한 같은 발언은 다른 단어로 포장되어 반복될 것입니다. 예산을 빨대로 보는 시각이 그대로라면, 다음 순직 소방관의 빈소 앞에서도 같은 사과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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