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값을 비워 놓고 짐과 좌석과 청소에 값을 하나씩 붙이는 것은 선택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총액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광장
항공권부터 숙박·공연까지, 기본값을 비운 채 하나씩 붙는 요금은 선택이 아니라 총액의 위장이다.
박세미 필자2026년 11월 8일기본값을 비워 놓고 짐과 좌석과 청소에 값을 하나씩 붙이는 것은 선택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총액을 감추는 일입니다. 항공권 예약 화면에서 3만 원짜리 표를 고르면 3만 원만 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수하물 위탁료와 좌석 지정료가 차례로 붙으면서 최종 결제액은 표시 가격의 배 가까이로 불어납니다. 하나의 상품을 여러 단계의 유료 옵션으로 쪼개 예약 과정 끝에야 총액을 확인하게 만드는 이른바 쪼개기 요금이라는 취지로 말한 방식이 항공·숙박·렌터카·공연 등 서비스업 전반에 퍼져 있고, 지금의 쟁점입니다.
업계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기본 요금에서 수하물 위탁료와 좌석 지정료를 떼어 내면 짐 없이 가벼이 여행하는 승객은 그만큼 덜 내고, 좌석 지정이 필요 없는 승객은 항공권만 사면 되니 맞춤형 선택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가격 경쟁이 쪼개진 항목 단위로 벌어지므로 원하는 것만 골라 담으면 전체 부담이 줄어든다고도 합니다. 숙박업계는 객실료를 낮추고 청소비를 따로 받는 것이 투숙객의 선택에 따른 합리적 분리라고 설명하고, 렌터카 업체는 보험료를 별도로 표시해 고객이 보험 수준을 직접 고르게 했다고 내세웁니다. 공연장과 극장도 좌석 위치에 따른 차등 요금을 관람객의 선택지 확대로 포장합니다.
그러나 짐 없이 여행하는 승객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당수 승객은 1박 이상의 여행에서 의류와 물품을 챙겨 수하물을 부칠 수밖에 없고, 동반자와 함께 탈 때 무작위 배정 좌석으로 떨어지는 것을 피하려 좌석을 지정하게 됩니다. 숙박의 청소비도 투숙객이 청소를 직접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경우를 빼면 피할 수 없는 비용으로 붙습니다. 렌터카의 기본 보험료 역시 차량을 운전하는 이상 거부하기 어려운 항목이고, 공연장의 좌석 차등 요금은 시야가 가린 자리를 피하려는 관람객의 자연스러운 선택을 이용해 추가 금액을 끌어냅니다. 필수 항목이 '선택 옵션'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어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 쪼개기가 개별 항목의 부담을 줄여 주는 게 아니라 비교의 기준이 되는 총액을 없앤다는 점입니다. 항공권 비교 사이트에 뜬 3만 원과 5만 원의 표를 놓고 더 싼 표를 골랐는데 수하물과 좌석을 더하면 5만 원짜리 표보다 비싸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숙박 예약 사이트에서 가장 낮은 객실가를 내건 숙소를 고르고 예약 마지막 단계에서 청소비가 붙어 다른 숙소보다 총액이 높아지는 일도 흔합니다. 광고와 비교 화면에 뜨는 가격이 실제 결제 총액과 달라지는 순간, 소비자는 같은 서비스의 값을 견주는 대신 각 사이트의 예약 과정을 끝까지 밟아 봐야 합니다. 경쟁이 값이 아니라 무엇을 빼 놓았는지 숨기는 실력으로 벌어지는 셈입니다.
수하물 위탁료, 좌석 지정료, 청소비, 보험료, 좌석 등급별 추가금. 이 항목들이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붙으면서 소비자의 계산은 예약 화면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어려워집니다. 사업자가 기본값에 무엇을 넣고 뺄지 스스로 정하는 구조에서 비교 가능한 총액은 사업자가 사실상 쥐고 있습니다. 같은 상품을 같은 조건으로 견주려는 소비자의 권리가 사업자의 표시 방식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예약 화면과 광고의 첫 줄에 필수 옵션이 포함된 총액을 먼저 보여야 합니다. 무엇을 기본값에 넣고 뺄지는 사업자가 아니라 소비자의 비교가 정하는 규칙이어야 합니다. 총액이 보이면 사업자는 쪼개기로 우위를 만드는 대신 실제 가격에서 겨루게 될 것입니다. 사업자가 무엇을 기본값에 넣을지 정하는 권한을 비교의 권리와 맞바꿔 온 거래, 이제 끝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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