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보는 진료는 의사가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 환자의 시간을 공짜로 쓰고 있는 것이다광장
예약 간격을 촘촘히 잡는 것은 같은 시각을 여러 명에게 파는 것이고, 그 초과분의 대가를 환자의 대기로 메우는 구조다.
박세미 필자2026년 10월 7일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보는 진료는 의사가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 환자의 시간을 공짜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약 시간은 병원이 정하고 환자가 지키도록 만들어진 시간입니다. 예약을 하고 가도 정해진 시간에 진료를 받기 어렵고, 대기실에서 30분에서 한 시간, 어떨 때는 그 이상을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예약제를 도입해 놓고도 실제 진료 시간과 예약 간격이 맞지 않아 대기가 생기는데, 그 비용이 누구에게 떠넘겨지는지 따지는 목소리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대기 시간은 이미 지불된 비용입니다. 예약 간격을 실제 진료 시간보다 촘촘하게 잡으면 같은 시간대를 여러 환자에게 배정하게 되고, 그 초과분에 해당하는 대기를 환자가 떠안게 됩니다. 병원 수입에는 예약이 빽빽하게 채워지지만 환자에게는 기다림이 쌓이는 구조입니다. 예약 판을 채우는 주체가 병원이라면 그 초과분의 대가 또한 병원이 청구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환자의 기다림으로 대신 지불되고 있습니다. 수입은 병원 계좌에 쌓이고 비용은 환자의 시간표에서 깎이는 거래입니다.
예약은 양쪽이 지키기로 한 약속입니다. 환자가 예약 시간을 어기면 노쇼라는 이름으로 페널티를 받습니다. 그런데 병원이 예약 시간을 어기면 환자의 기다림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합니다. 한쪽이 어기면 벌칙이 있고, 다른 쪽이 어기면 체념이 있을 뿐입니다.
의사가 늦는 건 앞선 환자를 더 꼼꼼히 봤기 때문이라는 방어를 종종 듣게 됩니다. 꼼꼼한 진료라는 명분이 대기를 정당화하는 방패로 쓰이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참이라면, 예약 간격을 실제 진료 시간에 맞춰 잡거나 초과분에 대해 미리 안내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관행은 꼼꼼한 진료의 결과가 아니라, 예약 가능 인원을 부풀려 놓는 과판매 전략의 결과일 것입니다.
대기실의 시간은 병원 수입이 늘어나는 동안 환자의 임금과 연차와 일정이 깎이는 시간입니다. 병원 입장에서 대기 인원은 무급으로 대기라는 비용을 떠안은 거래 상대입니다. 병원이 환자의 시간을 공짜로 쓰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려면 예약 시간과 실제 진료 시각의 차이를 예약 단계에서 알리고 책임지는 것이 최소한의 조치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요구합니다. 예약 화면에 평균 대기 시간을 공개하십시오. 지연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이유와 새로운 예상 시각을 알려야 하고, 지연이 반복되는 진료과는 예약 간격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예약 화면에 최근 평균 대기 시간이 뜨는 날이 와야, 환자는 자기가 지불하려는 비용의 전체를 보고 예약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정보 없는 동의는 동의가 아닙니다.
한 시간을 기다린 환자가 내는 진료비와 제시간에 본 환자가 내는 진료비가 같다면, 그 차이를 메우는 돈은 결국 기다린 사람의 시간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구조를 바로잡는 데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평균 대기 시간을 측정해 공개하고 예약 간격을 다시 계산하는 일은 오늘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는 대기의 시간을 환자에게서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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