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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 해지를 전화로만 받거나 깊은 메뉴 속에 숨겨 놓는 것은 이용자를 붙잡는 설계가 아니라 포기를 설계하는 것이다광장

해지를 어렵게 만드는 설계가 지키는 것은 이용자가 아니라 이용자의 망각에서 나오는 수익이다.

모민철 필자2026년 10월 11일

가입은 세 번의 클릭이고, 해지는 포기입니다. 스트리밍에서 뉴스, 클라우드 저장공간까지 한 번 결제수단을 등록하면 매달 앱은 알아서 돈을 빼가지만, 그 관계를 끊으려면 전화 연결 대기, 몇 겹의 메뉴 탐색, 그사이에 끼어드는 유예 혜택 제안을 차례로 거쳐야 합니다. 계약은 맺을 때나 끊을 때나 같은 무게여야 하는데, 현실의 구독 서비스는 한쪽 문은 활짝 열어두고 다른쪽 문은 안쪽에서 잠그고 있는 셈입니다.

이 비대칭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습니다. 쓰다 만 이용자가 내는 월 이용료가 전체 서비스 가격을 낮추는 재원이고, 붙어 있는 것이 결국 이용자에게도 이득이라는 주장입니다. 듣기엔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밑바닥을 들추면 다릅니다. 쓰지 않는 구독료는 거래가 아니라, 눈치챌 시간이 없는 사람에게 걷는 비용입니다. 자동 갱신과 숨은 해지 버튼이 만들어내는 수익은 이용자의 선택이 아니라 망각에서 나오며, 그 망각을 설계가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해명, 번복, 유예 제안, 침묵. 해지 화면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이 단계들은 이용자의 결심을 흐리고 시간을 빼앗습니다.

반면 구독을 진짜 사업으로 키우는 기업들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LG전자는 정수기,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에어컨, TV, 노트북까지 구독 제품군을 넓히며 매출 2조 원을 목표로 삼고, 기업 고객과 해외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제품을 쓰는 동안 관리 서비스를 다듬어, 쓸 만하니 계속 쓰겠다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SSG도 온라인 장보기 시장 공략을 위해 구독 혜택을 강화하고 있지요. 이쪽의 수익은 이용자를 붙잡아두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용자가 머무는 것에서 나옵니다. 해지를 어렵게 만드는 쪽과 이용을 깊게 만드는 쪽, 어느 쪽이 계약을 존중하는지는 대조만 봐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해지 문턱을 돈으로 바꾸는 설계는, 부드럽게 말하면 고객 유지 전략이지만 뼈대까지 가면 계약 해제의 자유를 침식하는 구조입니다. 소비자가 계약을 끝내는 데 드는 시간도 비용이고, 그 비용을 기업이 강제로 떠안기는 거래의 조건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바꾸는 짓입니다. 해지 경로는 투명해야 하고, 자동 갱신은 사전에 고지해야 하며, 유예 혜택은 이용자가 원할 때만 제시해야 합니다. 가입과 해지가 같은 화면, 같은 버튼으로 가능해야 공정한 계약입니다. 가입 버튼을 화면 한가운데에 두었다면, 해지 버튼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지 버튼을 숨기는 자는 가입 버튼에 새겨놓은 약속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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