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아래 글에 대한 반박입니다
개헌 지연이야말로 개혁을 죽인다 — 속도전을 탓할 때가 아니다개헌의 창은 속도가 아니라 신뢰가 연다 — '유일한 기회'론의 착각광장
속도전이 '유일한 창'이라는 주장의 전제 — 여세와 물량 — 은 신뢰라는 조건 앞에서 무너진다.
"이번이 유일한 기회"라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천 년 전에도 똑같은 압박이 있었습니다. 측근들이 결전을 서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장량과 소하는 먼저 민심을 얻으라 했고 그 길을 택한 쪽이 천하를 얻었습니다. 반면 기회를 놓칠까 재빨리 칼을 뽑은 쪽은, 그 급함 속에서 제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지금 백영우 변호사는 임기 초에 여세를 몰지 못하면 개헌 착수 자체가 불가능하니, 속도전은 조급함이 아니라 유일한 창이라고 주장합니다. 논리의 골격은 분명합니다. 시간이 창이라면 빠를수록 유리한 것이 맞지요. 하지만 그 전제가 틀렸습니다. 창을 여는 힘은 시간의 물량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아무리 임기 초라 해도, 개헌을 발의하는 권력에 대한 의심이 걷히지 않은 상태에서 속도를 올리면 창이 열리는 게 아니라 닫힙니다.
지금 가장 큰 걸림돌은 연임 조항입니다. 대통령실이 연임을 공약에 담겠다고 서약했는데, 그 서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연임을 전제로 권력 구조를 바꾸겠다 해놓고, 정작 연임 조항은 뺄 수도 있고 넣을 수도 있다는 식의 모호한 태도가 쌓여 왔습니다. 국민이 보기에 이건 개헌이 아니라 자기 임기를 늘리기 위한 선세우기입니다. 이 신뢰의 부재를 풀지 않은 채 속도만 올리면, 개헌 발의 자체가 권력 연장의 도구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대조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실은 지금 "빠르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대통령실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임 조항 포함을 공약처럼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속도를 논하는 쪽이 먼저 저질러 놓은 신뢰의 부채를 감추고 있습니다. 말은 연임 공약이었는데, 행동은 연임을 빼겠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내로남불을 국민이 못 볼 리 없지요.
역사를 보십시오. 개헌이 좌초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느려서가 아니라 정당성이 부족해서였습니다.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개헌 시도는, 여당의 의석 수가 충분해도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거나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통과된 개헌들은 하나같이 충분한 사회적 대화와 절차를 거쳤습니다. 속도가 아니라 절차와 신뢰가 통과를 결정한 셈입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개헌 사례에 적용되는 법칙은 아닙니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처럼 연임 신뢰 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속도전을 펴는 것은, 역사의 실패 패턴과 정확히 겹칩니다.
더 위험한 것은 실패의 후유증입니다.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개헌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거나 여론의 압도적 반대에 부딪혀 철회되면, 그 자체가 다음 개헌의 장애물이 됩니다. 실패한 개헌 시도는 "봐라, 개헌은 이렇게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어 다음 창이 열리는 시기를 더디게 만듭니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며 서두른 결과가 "다음에도 안 된다"는 불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속도론이 간과하는 가장 큰 비용입니다.
해법은 명확합니다. 속도를 논하기 전에, 먼저 연임 조항의 신뢰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연임을 넣을 것인지 뺄 것인지, 대통령실이 분명한 입장을 내놓고, 그 입장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확인하는 절차가 앞서야 합니다. 그 위에서 시민사회, 야당, 전문가들과 개헌의 방향과 내용을 조율하는 사회적 대화가 속도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빠지면, 아무리 빨라도 창은 닫힙니다.
백영우 변호사의 속도론은 "시간이 창이다"라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창을 여는 힘은 시간이 아닙니다. 신뢰입니다. 연임 서약이 흔들린 상태에서 서두르는 개헌은 불신만 키울 뿐입니다. 임기 초의 시간적 유리는 권력에 대한 신뢰가 받쳐줄 때만 창이 됩니다. 신뢰 없는 속도는 창이 아니라 벽입니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논리는 변혁을 여는 게 아니라 지지를 잃게 하여, 개헌이라는 창을 스스로 닫게 만듭니다. 그것이 이 속도전이 남길 교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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